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해 경제학은 상당한 무력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글에서는 그 원인을 살펴봄으로써 시사점을 얻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 글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경제學이라는 것이 學問으로서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학을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 같은 학문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경제학은 이론적인 체계가 전혀 완성되어 있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케인즈 학파와 시카고 학파(신자유주의 학파)가 현대 경제학의 대표적인 두 학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경제현상을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과 대책을 내놓습니다.
가령,
30년대의 대공황에 대하여 케인즈 학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대공황 때 정부에서 개입해서 훌륭하게 경제를 복구시켰다.
같은 대공황을 놓고 신자유주의 학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대공황 때 정부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자동조절기능을 발휘하여 스스로 복구됐다.
같은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이렇게 상반된다면, 경제學은 아직 學問으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제현상들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들이 있다,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이 실상에 가깝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은 1980년대 이래 전세계에 걸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이번 미국발 전세계의 경제위기로 인해 틀린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전세계에 적용되던 이론이 틀린 것이라면, 역시 스스로 學問의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IMF는 전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경제학자들과 경제관료 출신들이 모여 있는 국제기구입니다. 1982년에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외채위기에 빠지게 되고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입니다. 그로 인해 IMF에서 권고하는 경제개혁조치들을 취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이전보다 훨씬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경제성장률도 이전보다 더 떨어지고, 빈부격차는 더 확대되고 국제금융자본들만 배를 불립니다. 이러한 내용은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요새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요,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 중에 이전보다 좋아진 나라는 우리 나라 정도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IMF에서 우리나라 가지고 엄청 선전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나라가 좋아진 것은 IMF의 권고안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IMF의 잘못된 권고안을 극복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즉 IMF의 잘못된 권고안에도 불구하고 좋아졌던 것입니다. 이런 점은 IMF도 사후에 인정한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우리 민족 정말 저력있습니다.
요점은 IMF에 모여있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전직 경제관료들이 경제학 이론을 적용해봐야 전혀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제학 이론이란 것이 별 게 아닌거죠.
실제로 경제학을 공부해 보면 별 게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좀 심한 표현인지 모르겠네요 ^^; )
가끔 상당히 복잡해보이는 수식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가만히 무슨 얘기인지 뜯어보면 별 게 아닌 얘기를 일부러 복잡해보이게 수식화시켰다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어찌 보면, 경제학을 잘 모르는 문외한들에게 경제학이 꽤 대단한 학문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수식들, 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회과학이 수학과 자연과학에 대해 가졌던 열등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수학과 자연과학을 닮고 싶은 무의식적인, 혹은 의식적인 열망이 반영된 것이지요.
노벨상은 1901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1776년에 출간되었으니 노벨상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만약 국부론이 1901년 이후에 나왔다면 어떤 노벨상을 받았을까요?
정답은 노벨 문학상입니다.
그 만큼 국부론의 문장이 대단하고, 그 내용도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은근한 비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래 노벨의 유언에 따라 노벨상이 만들어질 때 경제학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969년에 없던 상이 새로 추가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들이 꽤 있습니다. 현대 경제이론이란 것이 전혀 현실과 들어맞지도 않는데,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노벨상의 수치라는 것이죠.
실제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블랙 숄즈가 공동창업자로 참여했던 롱텀캐피탈메니지먼트 (LTCM)가 1998년 파산하면서 미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례는 유명합니다.
또 하나, 노벨 경제학상이 주어지는 연구 업적을 보면 모두 수리적인 논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의 수학 편향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국부론에는 수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으니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조크입니다. 현대 경제학의 우습기만 한 편견(별로 정교하지도 못하면서 수리를 숭상하는…)을 꼬집는 것입니다.
현대 경제학 중에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우, 환상을 심어줄 뿐이라는 이유로 수학의 사용을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주류에서 밀려나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더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Cimio님 블로그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imio님은 아고라에도 글을 올려주시고 계신데, 개인 블로그에도 좋은 글과 자료들이 많습니다.
이래 저래 노벨 경제학상을 폐지하는 것이 맞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노벨 경제학상이 폐지되고 경제학이 좀 더 겸손해져서 학문의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잘못된 경제 정책의 폐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현대 주류 경제학이 무력증을 보이는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주류 경제학의 편견과 관련이 깊습니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그동안 경제현상의 본질, 근본원리, 이치를 소홀하게 여겼습니다.
가령 돈(화폐)이란 무엇인가? 주류 경제학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돈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실제로 나타나는 경제현상을 관찰함으로써, 변수들 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경제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고 답합니다.
돈이 무엇인지 고민하느라고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비실용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는 일반인들을 주눅들게 만들 복잡해보이는 수식을 들이밉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학파는,
벌어지는 현상들을 관찰하여 변수들 간의 관계를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 관계들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고 말합니다.
그들은 수식들이라는 게 그럴 듯한 포장물이고 장식품일 뿐 본질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보고, 수식의 사용을 거부합니다. 대신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관찰을 통해 파악한 관계들이 근본적인 법칙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밝혀내고자 합니다.
숫자, 수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줍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마치 알고 있는 듯한 환상, 현실이 매우 잘 통제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심어줍니다.
산업문명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경제’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습니다. 모두가 ‘경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문화, 역사, 철학, 정치, 사랑, 평등, 박애, 연민 등등 중요한 단어가 얼마든지 많은데도 안중에도 없습니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판국에 ~~ ,
이 한 마디면 모든 말을 침묵시킬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모순된 현상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예전보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럼 ‘경제’ 문제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최소한 과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도 거꾸로 사람들은 경제에 관해 더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쓰다 보니 옆 길로 좀 샌 느낌이네요 ^^
하여튼 우리 사회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커지면서 정부의 경제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주류 경제학은 그 위세가 대단해졌습니다. 이들은 일견 복잡해보이는 수식을 들이대며 폼(?)을 잡습니다.
어찌 보면 과거에 샤먼이 필요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현대에는 경제학자들이 제공하는 복잡해보이는 수식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를 안심시켜주는 숫자의 환상이 필요한 것이지요.
평화로운 시기에는 현대 주류 경제학자들의 실용적(?)인 태도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어려움을 겪어봐야 알 수 있다고 하지요?
이제 위기의 시대를 맞아 현대 경제학은 완전히 붕괴하고 있습니다.
현대 경제학이라는 것이 모래 위에 쌓아올린 바벨탑일 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래라는 허술한 토대 위에 바벨탑을 너무 높이 쌓아올렸다는 점입니다.
이번의 경제위기는 현대의 주류 경제학이 그냥 지나쳐버렸던 허술한 토대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모래라는 허술한 토대에 문제가 발생하니 그 위에 화려하게 쌓아올린 바벨탑은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은 경제현상의 본질과 근본원리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이번의 경제위기에 대해 단 한 마디 통찰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경제 위기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으려면 우리들은 19세기 이전 경제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일한 예외가 본질을 가지고 씨름했던 오스트리아 학파입니다.
애덤 스미스(1723-1790)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
토머스 맬서스(1766-1834)
를 아울러 고전학파 경제학이라고 부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18세기의 사고로부터 뭐 배울 게 있을까 싶으신가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200년 전으로부터 우리 인간의 본성이 많이 달라졌을까요?
더 거슬러올라가 2000년 전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이 많이 달라졌을까요?
우리 인간의 지혜가 기원전 6세기경에 태어난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기원 0년에 태어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더 발전한 것이 있을까요?
기원전 6세기의 공자, 기원전 4세기의 장자의 사상이 나온 뒤에 동양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상이 나온 게 있을까요?
기원전 5세기의 플라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나온 뒤에 서양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상이 나온 게 있을까요?
오늘날까지도 문학은 기원전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의 지혜는 2000년 전으로부터 별로 나아진 게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학도 18세기의 고전학파로부터 거의 반 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겪고 있는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면 18세기와 19세기의 경제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시기는 경제학의 태동기이므로 경제 문제의 본질에 대한 고민, 근본 원리에 대한 생산적인 사유가 넘쳐났습니다. 그들의 사유로부터 한 줄의 통찰이라도 얻어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정확히는 모르나 얻어들은 바로는, 제가 앞에서 든 예 말고도, 인간이 이룩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비조를 뛰어넘지 못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압니다. 정말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과연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눈 앞에 어른거리는 화려한 물질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테크닉적인 문제들일 뿐, 근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 인간의 역사가 과연 진보를 보이고 있는가?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1, 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서구 사회는, 과연 인간의 문명이 진보를 하긴 하는 것인가,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고 합니다. 저는 혹시 이번 경제위기가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심각하게 제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최소한 우리들 인간이, 이성의 발전, 진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유보하고 좀 더 겸손해져야 하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 하나를 열어젖힌 책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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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에는 엄청난 분량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종교적.국가별 역사에 대한 상식들이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교양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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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을 완역한
제 생각 중 하나는, 이 책을 ‘이치를 따져보는 법’,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을 위한 논술교재로도 최고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노동가치설’을 제시한 것은, 나중에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학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원래 주식중개인 겸 투자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국부론을 읽게 된 것을 계기로 경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교우위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한계’의 개념을 최초로 제시함으로써 나중에 ‘한계효용학파’라는 일군의 학파가 나올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리카도는 친구인 맬서스에게 대박주(?)를 찍어준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맬서스는 인구론이 너무 유명한데, 인구론의 결론이 아주 비관적이지요, 그런데 원래 비관적인 경향을 타고 난 것인지, 리카도가 찍어준 대박주도 조금 오르니 금방 팔아버려서 별 재미(?)를 못 봤다고 합니다.
인구론이 너무 유명해서인지 맬서스가 경제학자라는 사실은 잘 인식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경제학 분야에 남긴 족적은 작지 않습니다.
맬서스는 그의 저서 ‘경제학 원리’를 통해서 공황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는 공황의 원인으로 과소소비설을 제기함으로써, 케인즈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총수요 관리정책을 내세웠던 케인즈 혁명은, 맬서스의 과소소비설을 좀 더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앞선 글들에서 소개했던 미국의 초과수요 문제에 대한 앞선 고민을 맬서스와 마르크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맬서스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공업생산의 급격한 증진은 과잉생산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고, 이를 방지하는 시책으로서 비생산적인 소비가 필요하다(미국의 초과수요와 유사한)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생산은 담당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층도 경제적 유용성을 갖는다는 주장입니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당시에 고민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그는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급(생산)이 늘어나는 데에 따라 수요가 늘어나야 되는데, 그런 상태는 제대로 된 분배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하는 중요한 통찰을 남겼습니다.
(미국에서 뉴딜 정신에 입각한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가 취해진 것은 맬서스의 통찰에서 착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제 성장의 결과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으면 생산의 증가를 커버할 수 있는 소비의 증가가 수반되지 않으므로, 일반적 과잉생산이 발생하여 공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국 경제가 황금시대(1947~1972)를 지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 98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제도를 받아들인 이후, 한국 경제가 어려워진 이유를, 이보다 더 명쾌하게 본질적인 차원에서 설명한 내용은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모두 맬서스의 이 언급을 몇 번씩이고 곱씹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고전학파 경제학을 살펴보면, 이후에 나오게 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경제학의 맹아를 품고 있었고, 한계효용학파, 케인즈학파의 실질적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200년 뒤 오늘날의 경제 위기에 대한 통찰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탁월한 통찰력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리카도의 경우는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글을 잘 쓸 수 없었다고 하지요. 자신의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내는 데에 친구인 제임스 밀(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통찰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대가 이치를 따지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계몽주의의 시대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인간의 이성을 믿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이치를 따져서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당시는 신사들이 책을 열심히 읽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양은 오늘날에 비해 턱없이 적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서를 통해 지식의 양이 아니라 철학적인 깊이를 갖추고자 했습니다. 독서를 통해 사고하는 힘, 이치를 따져보는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치를 따지던 시절, 전문화(파편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 시절, 경제현상의 근본 원리와 본질을 고민하던 시절,
지금 경제위기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그 시절의 고민과 통찰로 돌아가야 할 듯 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학과 오스트리아 학파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써야겠습니다.
간단히만 얘기해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공황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연구가 가장 탁월한 것으로 공인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학자, 경제관료들은 당장 공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공부해야 합니다. 좌파(혹은 좌빨?) 경제학이라 배격할 것도 아니고, 19세기의 골동품이라 배격할 것도 아닙니다.
자본론 안에는 놀랍도록 생생하게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한 실마리와 실용적인 통찰이 가득합니다. 자본주의 초기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화폐란 무엇인가? 신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경제위기의 본질에 대해 진작에 경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학파 이후로는 경제학이 발전했다는 게 모두 ‘허상’인 듯 합니다. 얕은 테크닉 정도가 발달했을 뿐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19세기까지 경제학이 했던 고민들입니다.
우리 한국 경제학은 불행하게도 19세기 이후부터의 경제학만 수입했습니다. 서양의 최신 경제이론(이번에 다 붕괴해버린)을 수입하는 데만 급급한 모양새입니다. 국내의 경제학은 스스로 두 발을 딛고 서지 못합니다. 스스로 사유하지 못합니다.
지금 국내 경제학계에 필요한 것은 18세기와 19세기 경제학의 원전을 공부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경제학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의 원전으로 돌아가서 근본원리를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신용경색’이란 단어를 언급하면서, 지난 100일 동안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다 목격하면서도, 신용 창조 붕괴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어이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신용’이 무엇인지, ‘화폐’란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유럽과 미국은 공황을 여러 번 겪어보았습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연구도 전혀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닥쳐오면 큰일입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과 경제관료들에게, 당장 국부론, 자본론을 비롯한 원전으로 돌아가 공부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2012년] > 세일러님의 경제시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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