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세일러님의 경제시각

음모론과 미국 1 (09.05.13)

유랑검 2009. 9. 22. 15:04

ㅇ 알함브라 칙령과 유대인의 역사

 

1492년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경제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1492 1월 스페인은 그때까지도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이슬람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킵니다.

 

서기 711년에 이슬람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으니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역사는 780년이 넘는 셈입니다.

종교적인 열정이 충만했던 중세의 기독교도 유럽인들에게 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유럽 땅을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되찾자고 하는 목표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라 불리며 780년이 넘는 기간 내내 유럽인들의 숭고한 목표였습니다.

이 레콘키스타라는 숭고한 목표를 1492년에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전 유럽인들을 종교적으로 열광하게 만든 이 사건은 한 가지 여파를 낳습니다.

스페인에 흘러넘치게 된 자신감과 종교적 열정은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니라 유대교도들도 모두 쫓아내자는 추방령을 선포하도록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유대인들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들에게는 항상 멸시와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1492 3월에 스페인은 유대인에 대한 추방령인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떠나라.

우리는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금과 은, 화폐와 국가가 정하는 품목의 반출은 금지된다.”

 

결국 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말은 기만적인 구절일 뿐이고, 마지막 문장에 의해 유대인들은 재산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중세유럽에서 유대인의 역사는 원래 박해로 점철된 것이었지만 알함브라 칙령이 가져다준 충격은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중에서 이베리아 반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지낼 만한 곳이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던 환경의 영향으로 유대교도들에게도 숨쉴 공간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 영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도 몰려들었던 터라 당시 스페인에는 25만 명 가량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유대인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럽의 유대인 중에서도 산업과 문화에서 가장 앞서 가던 부유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알함브라 칙령은 종교적 열정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재산에 대한 탐욕이 또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시간 여유도 많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급하게 이루어진 탈출 행렬 가운데 2만명 정도는 지치고 병들어 죽어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페인을 떠나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당시 민족의 이산을 지켜본 어느 유대인 저술가는 이런 반박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해를 끼쳤는가? 당신들을 돕고 거들었을 뿐이다. …… 그렇다. 왕과 여왕은 실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떠나도 영혼만큼은 결코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부당한 박해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떠난다. 그러나 이 날을 잊지 않을 것이다. 결코.”

 

유대인 저술가의 분노와 저주는 결국 실현된 셈입니다.

당시 스페인 거주 유대인들은 산업과 문화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던 그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금융업과 각종 첨단 산업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핵심인력들이 모두 스페인을 떠난 셈입니다.

스페인이 지리상의 발견에서 앞서나가고 패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이들의 역량 발휘가 크게 기여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스페인을 떠나게 됨으로써 이후 스페인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지로 흩어집니다.

그 중에서 6만여명 정도가 포르투갈로 갔다가 결국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후 네덜란드의 번영에 크게 기여합니다.

 

세계의 부를 주도하는 국가는 스페인 -> 네덜란드-> 영국 -> 미국, 으로 바뀌게 되는데, 유대인들의 이주와 활약이 큰 작용을 하게 됩니다.

 

알함브라 칙령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중세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폴란드 한 나라에서만 수만명이 학살당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유대인들은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모진 박해와 방랑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숨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비극을 겪으면서 필사적으로 생존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유대인들의 비밀주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회의 주류세력이 선호하는 업종에는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국가에서나 기득권 세력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농장을 경영합니다. 가장 안정적인 치부수단이요, 부와 특권의 대물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상업활동도 전통적인(그래서 안정적인) 상업활동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안정적인 분야는 그 사회 주류세력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사이에 나타나게 되는 한 가지 트렌드는 전문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의사와 변호사 중 유대인의 비율은 매우 높습니다(인구에 비해).

지금은 의사와 변호사가 가장 인기직종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득권 세력이나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세습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으므로 골치아프게 공부하는 것을 선호할 리 없습니다.

 

홀로코스트가 닥쳐오더라도 쉽게 몸에 지니고 피신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귀금속 거래나,

생선이나 기타 식료품처럼 부패 때문에 필연적으로 재고를 많이 가져가지 않는 업종에 종사하는 것도 한 가지 특징입니다.

 

종교의 가르침 때문에 기독교도들은 취급하지 않던 대금업을 담당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해당 사회의 주류세력이 거들떠 보지 않는 분야, 즉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못한 불안정한 사업분야를 개척하는 쪽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0년의 코스닥 열풍으로 벤처기업이라는 단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되었지만, 사실 벤처라는 존재는 주류 세력의 입장에서는 전혀 선호하는 투자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출범 당시에는 돈이 될지 말지 모르는 불안정하고 망하기 쉬운 존재가 벤처입니다.

 

그 결과 당대의 주류세력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출판, 신문, 영화, 라디오, TV방송 등의 분야는 유대인들이 개척하게 됩니다.

결국 신생 산업인 미디어 분야는 유대인들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금융과 미디어를 비롯한 각 분야를 장악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용을 부리지도 않습니다(물론 상대적인 얘기입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도 극소수입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화교들에게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화교들은 사업상의 거래를 할 때 무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극소수파의 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모진 탄압을 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수파인 유대인들로서는 탐욕을 추구하더라도 최소한 노골적인 방식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고 현명한 방식을 추구합니다. 항상 다수파들보다는 관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선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미국 패권세력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영향인지 어떤지 미국은 패권국가로서 매우 현명하게 처신하는 패권국가입니다.

전략적인 사고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자신의 힘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 패권이 보여주는 전략적 사고와 유연함은 유대인들의 고난의 역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ㅇ 화폐와 음모론

 

유대인과 관련한 음모론이 좀 오버(?)하는 부분 한 가지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쑹훙빙이 쓴 화폐전쟁은 음모론의 결정판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이 책의 내용으로부터 여러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이나 금융관료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관료들은 이 책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덮치기 전에 미리 대비했다고 볼 수 있는 움직임들을 보였습니다. 화폐전쟁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화폐전쟁은 여러 가지 예리한 통찰을 제공해주는 고마운 책이지만, 한 가지 오해를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유대인 음모론의 중요한 한 축이기도 한데,

그것은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가 달러를 찍어낼 때 국민들로부터 근거없는 이자를 걷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냥 종이에 찍어내는 달러를 반드시 국채를 받고 제공한다, 인쇄비 정도만 들이고 찍어내는 달러에 대해 국채의 이자(=국민의 세금)를 지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사기극일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정도 이상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봅니다.

 

국민들의 피를 빠는 거머리나 흡혈귀, 숙주에 기생하는 기생충 같은 비유가 등장합니다.

국민들이 음모세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쑹훙빙이 실제로 그렇게 오해를 한 것인지, 뜻과 다르게 글의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번역과정의 오해가 중첩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화폐전쟁을 읽어보면 그런 논리로 보이고, 그런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최소한 FRB의 음모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신용(통화)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음모가 있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은행시스템 전체의 음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쑹훙빙이 화폐전쟁에서 미국의 국채발행 절차에 대해 묘사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회가 국채 발행 규모를 승인하면 재무부가 국채를 다양한 종류의 채권으로 설계한다. …… 이러한 채권은 …… 공개시장에서 경매로 팔린다. 경매에서 끝까지 팔리지 않은 국채를 재무부가 연방준비은행으로 보내면 연방준비은행이 액면가로 전량을 사들인다. 이러한 국채는 연방준비은행 장부의 증권자산 항목에 기재된다.” (쑹훙빙, ‘화폐전쟁’, 359~360페이지)

 

이렇게 해서 연방준비은행(FRB)은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사들인 국채의 이자(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지불) 수입을 올리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위의 설명에서 쑹훙빙이 한 가지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FRB가 국채를 사들이기 이전 단계, 즉 공개시장에서 국채가 경매로 팔려나가는 단계에서 이 국채의 상당부분을 시중의 일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들이 사들이게 됩니다.

만약 FRB가 국채 이자를 사기로 취득하고 있다고 비난받아야 한다면, 시중 은행들도 똑 같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시중 은행들은 신용(통화)로 국채를 인수합니다.

 

다음 그래프는 전체 통화량 중에서 신용(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래프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광의 유동성인 L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전체 통화량 중에서 신용(통화)의 비중이 97%를 넘습니다.

 

신용(통화)가 생겨나는 것은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에 대해서는 저의 지난 글, 인플레인가, 디플레인가?,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은행은 신용창조 기능을 통해서 없는 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은행의 신용(통화)창조는 대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국채를 인수한다는 것은 국가를 상대로 대출을 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상대로 대출을 함(국채 인수)으로써 신용(통화)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즉 은행이 국채를 인수함으로써 없는 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없는 돈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돈을 가지고 국채를 인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은행이 갖는 신용창조 기능의 이와 같은 측면 때문에, FRB가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달러를 만들어내고는 그 돈으로 국채를 인수한다는 오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때 달러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신용(통화)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지 물리적인 달러 현찰을 찍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리는 시중 은행들에게도 전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결국 쑹훙빙의 논리대로 FRB가 공짜로 국민들의 세금인 국채의 이자를 가져가고 있다고 얘기하려면, 마찬가지 논리가 시중의 은행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시중 은행들도 공짜로 국민들의 세금인 국채의 이자를 가져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둘러싸고 사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실제로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기성은 FRB의 음모가 아니라 은행의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 자체가 사기성이 농후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은 부분 지불 준비금 제도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래의 설명은 저의 책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다소 길지만 여기에 다시 반복해서 올립니다)

 

시중은행이 고객이 예금한 돈을 가지고 다시 대출을 할 때는, 일정 비율의 돈을 ‘지불준비금’으로 비축해두어야 합니다.

지불준비금을 어느 정도 따로 떼서 비축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것이 ‘지불준비율’이고, 현재 우리나라의 지불준비율은 평균(예금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름) 3.5%입니다.

 

3.5%의 비율은 애초에 고객이 예금한 금액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적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5,000만 원을 은행에 예금하면 내 통장에는 5,000만 원이 찍히겠지만, 실상 은행의 금고 안에는 내가 예금한 5,000만 원 중 175만 원(3.5%)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은 돈만 은행에 남겨놓아도 괜찮은 것은, 은행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내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으로 은행을 못 믿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내 돈을 돌려달라고 하게 되면 은행은 망하게 됩니다.

다수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내 돈을 돌려달라고 하게 되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금융 시스템이라는 것이 ‘첨단금융 기법’을 자랑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취약성의 근원은 금융 시스템의 심장인 은행에게 법적으로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은행이라는 사업모델이 도입된 초창기에는 이 ‘부분 지불준비금’제도를 둘러싸고 예금주와 은행 사이에 법률적인 다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5,000만 원을 예금해둔 예금주가 어느 날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는데, 은행이 지불준비금이 부족하여 고객 돈을 다 내주지 못하는 일이 꽤 발생했던 것입니다. 내 돈 찾으러 은행에 갔는데 ‘실상 은행금고에는 내 돈이 없더라’라는 상황은 고객 입장에서는 황당할 노릇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화폐가 금화였기에 고객들의 분노는 더욱 컸습니다. 분노한 고객들은 자기 돈을 마음대로 처분해버린 은행가를 ‘사기’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이에 대해 법률적인 다툼이 자주 벌어졌는데, 1848년의 ‘폴리 대 힐 사건(Foley vs. Hill and Others)’의 판례를 계기로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가 합법임을 최종적으로 승인받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의 합법성은 인정받게 되었지만 ‘은행’이라는 사업모델이 ‘폰지사기’(뒤에 가입하는 사람의 돈으로 앞사람 돈을 내주는 금융사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본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경제학파 중 오스트리아 학파는 은행의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를 바탕으로 한 신용창조 행위를 ‘가짜 돈을 몰래 찍어내는 행위’ 즉 사실상의 사기행위로 규정합니다.

 

이치로만 따지면, 이를 ‘사기’로 보고 법적으로 아예 금지시키는 것이 맞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기능이 자본주의 체제에 순기능을 한다고 보고 정책적으로 은행에게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가 사기라는 것은, 만약 같은 행위를 은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임의로 하겠다고 들면 ‘유사수신 행위’로 엄벌에 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스트리아 학파의 표현을 써보자면 몰래 찍어낸 가짜 돈을 가지고 국채를 인수하고 이자를 받고 있으니 사기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사기성은 FRB의 음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책적으로 모든 은행에게 합법성이 부여된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